한 잔의 차는 마음의 여유와 사색을 준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 구절을 생각해 본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 사이 놓인 한 동이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혼자 마시네
擧盃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대하니 셋이 되었구나
달 밝은 밤에 혼자 술을 마시는 광경~~
술, 잔, 달, 그림자, 그리고 나로 연결되는 시공간은 적막 속임에도 도취의 세계이다.
텅 빈 고독 속에 넘치는 달빛의 충만, 혼자 만이 누리는 술맛의 흥취를 누가 알까?
'잔 들어 달을 맞이하고'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와 교감을 나누는 모습이다.
달, 술, 나만의 세계는 도취와 충만이면서 텅 빈 시공간을 보여준다.
고독, 무상을 뛰어넘는 영원과의 대화가 아닐 수 없다.
오래 전에 바닷가 근교의 사찰에 있는 한 스님이 보름달이 뜨거든,
바다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자며 초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은근한 초청에 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곤 하였다.
만약에 술 대신 '월하독다(月下獨茶)'라면 어떤 세계일까?
달, 차, 나의 시공간은 명상의 세계가 되리라.
둘이서 차를 든다고 해도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달빛 속에서 마음을 교감하면 될 뿐이다.
술잔일 경우엔 술의 맛이 우선이지만, 찻잔일 경우엔 잔과 차가 동등해야 제 격이다.
하나의 찻그릇은 품격과 숨결을 지니고 있다.
찻잔은 대화의 대상일 뿐 아니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벗이다.
그릇이란 실용과 감상이란 두 가지 효능을 지니지만,
찻그릇은 실용과 미의식을 초월하여 오래 동안 정과 마음을 나눈 벗과 다름없는 친밀감을 지닌다.
도공(陶工)이 가마에서 동시에 구워낸 찻잔이라 할지라도,
이를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찻그릇의 품격이 사뭇 달라진다.
고결하고 깨끗한 인품의 소유자가 오래 동안 애용한 찻그릇과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찻그릇과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찻그릇은 애용하는 이의 마음의 빛깔, 생각의 체온, 사색의 때가 묻어서 점점 오묘해지고 깊어져 간다.
茶人들은 찻그릇을 아끼고 사랑한다.
먼 여행을 할 적에도 지니고 다닌다.
도공이 만들어낸 순간에 명기(名器)가 되는 게 아니다.
'양기(養器)'라는 말이 있는데, 그릇을 기른다는 뜻이다.
가마에서 갓 구워낸 그릇이 바로 명기(名器)가 될 수 없으며,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쓰는 이의 인격과 마음의 경지에 따라 찻그릇이 차차 완성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찻그릇을 손에 쥐고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 속에 우주에 가 닿아있어야
찻그릇에도 명상의 이끼가 묻고 오묘함이 깃들고 깨달음의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찻그릇은 사용하는 이의 품격을 닮아간다.
명상 속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찻그릇을 생각한다.
깨달음의 꽃이 되어 피어있는 찻그릇 하나를 생각해본다.
비어 있지만 가득 차 있고, 담담하지만 오묘하고,
단아하지만 인격의 향기가 나는 찻그릇 하나~~
달빛과 청산의 모습이 담기고 그리운 벗의 모습이 보인다.
고독 속에 혼자 앉아 차를 마시는 맛을 누가 알 것인가.
찻그릇만이 함께 나눌 수 있다.
찻그릇은 온몸으로 교감하는 대상이며, 정과 마음을 나누었기에 함부로 할 수 없다.
찻그릇을 대하면 마음이 순수해지고 온화해진다.
잡념이 사라지고 대금 산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찻그릇은 보는 것만으로 안정과 휴식을 가져다준다.
우리 녹차의 맛은 명상의 맛이 아닐까 한다.
벗이 오면 먼저 차를 내놓는다.
한 잔의 차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고 청담을 나누고자 한다.
옛 茶人들은 차를 잔에 부어 권할 적에
손의 땀 냄새를 없애려고 침향(沈香)을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침향은 향나무가 땅 속에 묻혀 천년이 지나면 안으로 향기를 품어 심오해진다.
천년 간의 향기를 땅속에서 스스로 완성시킨 것이 침향이다.
아무도 몰래 땅속에 파묻혀 있던 천년의 향기~~
곧 영원의 향기인 것이다.
홍수나 지각변동으로 땅 위로 나온 침향은 귀한 약재로 쓰인다.
茶人들이 이를 두 손으로 비비면 손에 짙은 향기가 묻는다.
그 손으로 찻잔을 권하게 되면 땀 냄새도 없어질 뿐 아니라 향기가 찻잔에 가 닿는다.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침향으로 인해 영원을 호홉할 수 있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으로 짜여져 있는 인생은 영원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하다.
하물며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으랴.
그러나 침향으로 인해 천년~~
아니 영원의 향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야말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찻그릇에 침향이 깃들게 됨으로써 차 그릇은 인격이 아닌 신격으로 비춰진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었다고 할 만큼 왜인들이 우리나라에 침공하여
도공들을 잡아가 도자기문화를 일으켰다.
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이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에선 막사발로 불리는 찻그릇이다.
보기에 칙칙하고 수수해 보인다.
섬세하고 정교한 미의식을 보여 오던 일본 도자기와는
판이한 막사발이 어떻게 국보가 될 수 있었을까.
중국, 일본 등의 도자기는 기능과 외형미에 치중한 면이 강하지만,
우리 도자기는 단색 추구에다 형식과 장식적인 미의식을 초월하여
내면미의 탐구에 몰두하여 깨달음의 미에 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서울 근교 양수리 수종사(水鍾寺)엔 '삼정헌(三鼎軒)'이란 다실(茶室)이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다산(茶山) 정약용, 추사(秋史) 김정희,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모여 차를 마시던 곳이다.
이들은 달밤에 두물머리 광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으로 차를 마셨을까.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들이 사용하던 찻잔은 어떤 것이었을까.
요즘의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 형식적인 면에 얽매여 있는 듯하다.
일본 다도(茶道)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이며
일본의 다도는 통치문화의 한 유형으로 엄격한 형식과 법도에 치중하여
여유와 자유스러움이 부족하다.
형식과 규격이 아닌 자유와 달관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차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나도 명상의 한 복판에 찻그릇 하나를 준비해 두어야겠다.
사색의 이끼와 체온으로 마음의 빛깔을 우러나게 하고 텅 비어 있어도
향기가 머물러 있는 듯한 고요하고 정겨운 찻그릇 하나~~
영원에의 그리움을 전해주는 찻그릇 하나를 마음 한 가운데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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