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이야기/커피 이야기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 / 우스이 류이치로 저 | 김수경 역

우석푸른바다 2011. 2. 2. 23:39

 

 

커피를 통해 본 세계역사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통해서 역사를 설명하고 그 배경을 알려주는 책이 아주 가끔씩이지만 출간되고 있다. 무엇무엇
으로 풀어보는 세계사류의 책이 그런 형식의 책인데,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는 그런 일상적인 세계사류의 책과 뚜
렷하게 대비되는 강점이 한가지 존재한다. 일반적인 세계사의 책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이 당시의 사회에 끼친 ...

책소개

역사를 움직인 커피
커피를 통해 세계의 역사를 바라본다!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 역사를 돌아 흐르는 이슬람의 검은 피!』. 이 책은 우리 생활 속에 흔해빠진 커피라는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관여했는지를 알려준다. 400여 년에 걸친 커피의 역사를 통해 세계 역사의 흐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이슬람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와 커피 문화. 커피는 서아시아 지방에서 ‘커피의 집’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첫 선을 보인다. 그 후 런던으로 건너간 커피는 ‘커피하우스’로 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 마련하는데 기여한다. 파리에서는 프랑스혁명의 거점이 된 카페의 모습으로 자유와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또한 커피는 열강의 식민지 착취와 인종차별에도 깊이 개입했다. 그리고 급기야 독일에서는 시민사회의 돌연변이라고 할 파시즘을 낳고 만다. 8개의 장으로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처음 커피가 탄생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커피 문명의 성격, 그리고 유럽과 전세계 역사 속에서의 커피가 끼친 영향들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우스이 류이치로

지은이—우스이 류이치로194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1972년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도쿄대학 교양학부(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 전공) 교수로 있다. 저서로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나 제거스로』 『바하오펜론집성』 『빵과 와인이 돌고 신화가 돌고』 『말라버린 나무의 언어』 『기억과 기록』 등이 있다.

옮긴이—김수경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요미우리신문사 서울지국에서 기자로 일했다. 항상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책’이 좋아서 도서 에이전트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청춘이란』 『여자 나이 50』 『기획서는 한줄!』 등이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

“그까짓 커피 한 잔이 역사를 움직였다고?”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비슷한 울림으로 불리는 ‘커피’는 원유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무역상품이다. 모터리제이션이 일반화된 현대산업사회에서 석유는 없어서는 안 될 원료이지만, 기호식품에 불과한 커피가 2위라니 선뜻 믿기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 생활 속에서 흔해빠진 커피라는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관여했는지’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400여 년에 걸친 커피의 역사를 더듬어 나간다.
널리 알려진 커피의 기원전설 중 하나는 아라비아의 산양치기 칼디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칼디가 산양 무리를 새 목초지로 데리고 갔는데, 산양들이 흥분을 해서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당황한 칼디는 근처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도원장 스키아들리가 조사해보니,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열매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먹어보다가 한 번은 끓여서 마셔보았다. 그러자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수도원에서는 밤에 예배를 볼 때마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수도사들이 있었다. 수도원장은 그 열매 끓인 음료를 그들에게 마시게 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그 후로 수도원에서는 저녁예배 때마다 그 검은 음료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동아프리카. 그곳에서 자란 커피콩을 원료로 이슬람 수피들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는 서아시아 지방에서 ‘커피의 집’을 통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피들은 마시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커피의 네거티브한 특성을 그대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서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신과 합일을 이루고자 커피를 마셨다. 그런 커피의 항면작용과 사교장으로서의 문화적 효능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유럽 대륙으로 전파된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성지순례이다.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는 그 자체가 거대한 상품수송기관이자 정보전달기관이었다. 머지않아 커피의 운반과 교환에 이슬람 세계의 거상들과 유럽제국의 상인자본가가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근대 상품교환사회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세계 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그 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지로 전파된 커피는 각 나라의 문화에 포함되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거친다.

커피교역은 처음부터 거창한 국제성을 띠었다.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알선하는 것은 상인들이다. 초기의 커피교역을 주도한 것은 모카나 아덴을 비롯한 남아라비아 소도시의 상인들이었다. 특히 옛날부터 아라비아에 살면서 상업 활동에 깊이 관여한 유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커피에 관한 노래도 17세기 예멘의 유대인 상인들 사이에서 불린 「커피와 카트」라는 것으로 아라비아 문자로 기록된 헤브라이어 노래이다. 덧붙여서 밥 딜런도 「ONE MORE CUP OF COFFEE」라는 노래에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를 이스라엘 선율이 떠오르는 곡조로 노래했다. 미국의 미네소타 주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알렌 짐머맨(밥 딜런의 본명)의 핏속에는, 커피를 노래할 때는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것 같은 애절한 선율에 실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흐르는 모양이다.

“저 계곡 아래로 길을 나서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 더.” --- 밥 딜런, 「ONE MORE CUP OF COFFEE」

런던으로 건너간 커피는 ‘커피하우스’로 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이라 불리며 런던 시민들을 공론 형성의 장으로 불러냈다. 드라이든, 포프, 스위프트 등의 수많은 문인이 이곳을 통해 배출되었고, 「테틀러」와 「스펙테이터」 등의 신문을 발행한 곳도 커피하우스였다.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 로이드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우체국, 주식거래소, 곡물거래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를 위한 사무공간으로서도 한몫을 했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영국으로 건너오자 런던 시민들뫀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아라비아 말, ‘아브라카다브라’라고 쓴 부적을 가슴에 품고는 쭈뼛쭈뼛 커피하우스를 찾아가 ‘커피가 페스트 예방에 좋다’는 등의 정보교환에 열을 올렸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러나 영국의 커피하우스와 커피문화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탓인데, 영국에서의 커피의 몰락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1674년, 남편들이 허구한 날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데 애태우던 아내들이 커피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자 발행한 진귀한 팸플릿이다. 정식 제목은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 남자들을 사막처럼 메마르고 쇠약하게 만드는 음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그녀들의 섹스에 발생하는 거대한 불편을 공공의 사려에 호소한다」이다. 「여성의 청원」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커피는 힘세고 기세 좋던 영국인의 자손을 ‘원숭이와 피그미 계열로 왜소하게’ 만들었고, ‘자연을 다치게 하는 유해한 작용’이 있다. 그녀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남편들이 걸핏하면 커피하우스에 가서 여성의 특권이랄 수 있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여성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남편들은 커피하우스에서 ‘마치 웅덩이에 모여 있는 개구리처럼, 흙탕물 같은 액체를 홀짝홀짝 마시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워낙 정치가인양 행세하는 남편들이 한심했는데, 가장 중대한 화제라는 것이 ‘홍해는 무슨 색일까’, ‘터키 황제는 루터파인가 칼뱅교도인가’, ‘카인의 의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심지어 결판을 낼 때 사용하는 무기가 그 옛날의 기개 넘치던 퍼포머의 모습이 아니라 여성들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혓바닥뿐인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전철을 밟지 않고, 커피와 카페를 시민혁명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이 프랑스다.

파리로 건너간 커피는 프랑스혁명의 거점이 된 카페의 모습으로 자유와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커피가 사람의 심신에 아주 해롭다는 풍설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독특한 커피문화를 발달시켰다. 바로 카페오레다. 커피가 몸에 나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 프랑스 땅에는 풍요와 청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암소와 우유가 있지 않은가! 우유를 섞어 마셔서 커피의 독성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카페의 발전도 결코 여성을 배제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받아들인 것이 베르사유의 귀족부인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들은 커피의 아로마에 흠뻑 취한 채 터키황제의 후궁이나 술탄 왕비의 머리모양 등을 떠올리며 저 먼 오리엔트의 파라다이스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베르사유 귀부인들을 목가적 취미에 빠지게 해서 성대한 ‘커피 모임’을 유행하게 만들고, 그것이 국가의 재정에 부담을 주기에 이른다. 프랑스 카페는 처음부터 여성의 출입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영국의 「여성의 청원」에서 호소한 것처럼 ‘섹스의 부재’를 한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의 존재는 프랑스의 카페문화를 국민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뿌리 내리게 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작전사령부로 명성을 날린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그 대표격이다. 머지않아 프랑스 계몽주의와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이름을 떨친, 파리를 대표하는 카페이다. 프로코프의 개점은 16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100년 전이었다. 프로코프를 위시하여 파리의 파레 루아얄 광장 주변에 늘어선 카페들은 지식인들과 일거리가 없는 변호사, 의사, 배우, 문인들이 모여 ‘카페정치’를 꽃피웠고 프랑스혁명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독일 쪽을 바라보면 커피의 앞길이 그리 순탄치 않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에 샴페인을 넣어서 끓인 뒤 후춧가루를 뿌려 마셨다고 한다. 이 모순 넘치는 대왕은 네덜란드에서 들여오는 수입커피에 거액을 지불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대용커피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는다. 치커리, 보리, 사탕수수, 무화과, 땅콩뿐만 아니라 땅에서 나는 모든 열매로 대용커피를 만들었다. 심지어 바다에서 나는 해초로도 커피를 만들었다.

특이한 것은, 군국주의가 판을 치던 프로이센의 수도에 생겨난 별난 카페에서의 커피와 설탕의 관계이다. 베를린의 카페는 콘디토라이(Konditorei, 과자점) 스타일이다. 이슬람 수피즘의 커피는 본래 쓴 것이었다. 유럽의 달콤한 커피와 케이크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베네치아이다. 18세기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광장 근처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카페 플로리안을 비롯한 커피집들이 앞 다투어 들어서기 시작했고 설탕을 넉넉하게 사용하면서 번성했다. 베네치아의 설탕과자점과 카페는 그 시대의 인기산업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설탕과자와 카페테리아에 관련된 상업부문에서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확립한 것은 스위스 산악도시 엥가딘 출신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사업은 1766년까지 베네치아에서 번영을 누렸지만, 베네치아 당국과 마찰을 빚어 958명의 엥가딘 출신 과자업자와 카페테리아 경영자들이 도시공화국에서 추방당했다. 베네치아에서 쫓겨난 그들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남성적인 신흥도시 베를린으로 쇄도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독점을 형성했다. 그들은 상대국가의 사정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이 나라는 나폴레옹 해방전쟁(1813~1815)을 거치면서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프로이센 군인이다…….’ 엥가딘 사람들은 프

[YES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