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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면서 책과 노트가 맨들맨들, 투명한 거울처럼 될 때까지

우석푸른바다 2017. 9. 22. 18:53

 

                             
글 한 줄, 시 한 구절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게 나날이 체험 중인 책의 매력이다.

‘의젓한’ 셀프 힐링이라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특히 마음 치유에 있어서도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말한 이후로 지금까지 학문적으로도 그 치유효과는 충분히 입증되어 왔다.

현대에는 독서치료(또는 문학치료) 등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로 발전돼 많은 치료사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마술이나 요술, 그 이상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 책이나 집어 읽는다고 치유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치 약을 처방 받고 용법을 안내 받는 것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은 치유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책’이다.

여기서 구구절절이 방법론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도 찾아내든, 찾아 가든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신의학적 치료와 그 맥락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쓰기’와 묶어 봤다.

두 개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다.

‘읽기’가 다른 사람이 쓴 글들에서, 등장인물에게 동일시되고, 내용이나 어느 장면, 모티브로부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통찰을 얻어가는 과정을 거친다면, ‘쓰기’는 ‘아직 표현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읽어 보고,

정리하며 ‘읽기’를 통해 얻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기’도 읽기만큼 훌륭한 셀프 힐링법이다.



문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이다.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치유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진실성’에 달린 문제다.

의사나 전문치료사가 가이드는 해줄 수 있어도 답을 찾아내 손에 쥐어주지는 못한다.

마음을 수술할 수 있는 마법의 메쓰는 현실에 없다.

 자기를 기만하거나 속임이 없이,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해야 한다.

그게 해석의 중요성이다. 스스로 심판관이 되어서 옳고(T) 그름(F)의 진리치를 기계적으로 따지는 해석이 아니다. 



규칙은 없다.

진실성을 객관적으로 따져주고 평가해줄 이는 자신 외에는 없다.

나를 '읽고 쓰는' 일의 목적은 현재의 내가 잘 사는 데에 있다.


읽고 쓰면서 책과 노트가 맨들맨들, 투명한 거울처럼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들여다보면 무언가 보인다. 당신의 맑은 마음이다.  

휘둘리고, 흔들리지 않는 있는 그대로가 보인다. 그럼 계속 보면 된다.


(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