率土山房/설록의 노래

찻잔에 멈춘 시간

우석푸른바다 2015. 10. 19. 06:38

 

하얀 점점점 아침 햇살 따라 살살 흐르는 책상 먼지들, 내 먼지인가, 나도 먼지인가, 겹겹 쌓인 책 틈마다 느긋히 내려앉는다. 의자 깊숙이 눌러 앉아 다시 몸을 뒤척인다. 길게 흐르는 먼지 탓이다, 기지개 몇 번, 허리 목 돌리기 또 몇 번 움직거린 건. 녹차잎을 듬쁙 넣고, 더운 물을 차주전자에 다시 붓는다. 눈을 비비고, 껌뻑껌뻑, 느릿 창가로 몸을 돌린다. 하늘을 나는 구름 몇 점이 눈부시다. 괜히, 꿈 꾸듯 중얼거린다. ‘백년, 천년, 아니 지구 이전 구름이거나 지금 구름이란 같을 것!’

 

우연이었을까. 찻잔이 식을 즈음, 창가 틈으로 스치는 바람결 구름향이 콧등에 스친다. 몇몇 편한 느낌들이 콧등에서 피어올라 눈가에서 춤춘다. 아, 그래 맞아. 기쁜 듯 눈을 깜빡였다. 맞아, 멈춘 세상, 차향과 함께 소리도 멈추었다. 멋진 순간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함께 멈춘 행복, 멈춘 세상을 보는 일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차 한 모금에 다시 차잔을 어루만지며, 책상에 멈춘 잡동사니들, 그들의 시간을 툭, 툭, 툭, 바라다 본다. 오래 쌓아두었던 먼지만큼 뿌연 못마땅함 같은 것들이 저마다 풀썩거린다. 몇 년은 넘게 묵묵히 지켜보았던 서류들과 책이며 원고들. 오래된 책 한 묶음 꺼내든 것은 차향이 흔들거려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원고 몇 장도 내 것이 아닌 양, 비틀거리며 제 갈길을 몰라 헤매고 있었다.

 

한 때, 태풍이거나 그 파도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서로 다른 느낌으로 남아, 언제라도 ‘나도, 나도’ 하며 되살아나곤 하는 책 중간 중간. 천천히 접힌 편편을 넘겼다. 책장마다 낙서 몇 개들이 꿈틀거린다. 멈춘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라며 손드는 녀석들. 후후, 아예 책상 위에 눕는다. 후후, 그래 내가 만든 것이니 내 것, 내 녀석들이다. 잘게 작게 뒹구는 이런저런 색깔 기쁨이거나 상처들이 서로 껴안으며 손짓을 한다. ‘나 좀 보아줘, 만져줘!’ 라며.

 

기어이 좋은 것과 아닌 것을 나누었다. 그래, 사람은 저마다 나쁜 것과 아닌 것이 다르지,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그래도 서로 붙들고 있는 것, 녀석들이란 항상 자르고 나누어 놓고 보면, 언제나 하찮을 뿐인데 말이다. 그 하찮은 것들이 모여 결국 내 것이 되었다니, 또한 앞으로 쓸데 없는 것들이 모여 내 것이 되는 바, 내 스스로 그 상처를 계속 만들고 달래줘야 하다니.

 

계속 만들어야 할 녀석들이란 결국 작은 차향의 두께만큼이나 작은 차이에서 출발하는 것. 그 작은 차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뚱딴지 소리는 아닌지 모르겠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인 듯, 어쩌면 각자 그들이 섰던 자리와 또한 그 시간이 모두 다르기 때문인 듯, 그래서 만나는 사람이 다르고, 당연지사, 지금 하는 일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새 뚱딴지 소리는 아닐는지.

 

지금 가만히 있기 위해, 나를 잘 붙잡고 있기 위해 , 먼저 해야 할 일이라면 작은 차이를, 매 순간, 어떻게 잘 만지고 있느냐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뻔한 무의식이야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부끄럼을 하나씩 걷어내는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사람들과의 작은 차이를 극복해내는 불씨를 당기는 것일 것. 그렇다. 언제나 잘 있으려면, 작은 나를 잘 만지는 일부터 출발해야 해야 할 것.

작은 차이를 잘 구분하는 일이 나를 아는 일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며, 나도 모르게 차향을 입술에 댄다. 그래, 맞아. 작은 차이가 바로 내 부끄럼일지 몰라. 내 부끄럼을 사랑하는 일이 나를 알아가는 일인지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어떤 움직임이 자신을 만지는 거지? 어떻게 만져야 나를 보고 맑게 웃을 수 있지? 아무 생각없이? 찻잔만 만지듯?

 

차주전자를 천천히 돌리며 찻잔 속을 깊이 더 깊이 본다. 나만의 시간이란 내 찻잔에서 찻잔을 만진 손끝에서 나온다는 가벼운 생각이 구름 타고 흔들거린다. 후후. 그래 상상하는 거야. 내 손끝에서 시간이 만들어지는 거라는 상상. 꿈이란, 아름답게 꿀수록 더 멋있어지는 거라는 상상. 그렇지 않으면, 심심해 어찌 지금을 버팅길 수 있겠느냐는 거다. 혹시 이것이 살아있음에 대한 확인이 아닐까 하며, 눈을 살짝 감았다 떠 본다.

 

과거든 미래든 떠도는 상상. 그것은 꿈이란 말로 가끔 포장되곤 한다. 상상의 그 힘은 우리를 새로운 Blue Ocean이란 기쁨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다른 기쁨을 만드는 것. 꿈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이 곧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 맞을까? 새로운 사람은 만나려 노력하는 순간, 내 자신이 새로운 사람일 것이고, 그 순간이 곧 나 자신을 만지는 순간, 또 맞을까?

 

때묻은 종이들을 뒤적거리는 상상의 꼬리는 조선에 차를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다성이라 불리우는 초의선사의 색바랜 복사물로 이어졌다. 다산 정약용을 선생으로 여기며, 유명세를 멀리하려 40년을 홀로 암자에서 생활하려 한 그. 같은 나이에 평생 친구로 지내는 추사 김정희가 귀향을 가자, 아픈 마음을 담았다는 글 한 토막이 눈길을 잡는다. 서로 새로운 사람이고자 노력했던 그들, 서로 작은 차이를 극복하려 했던 그들의 모습을 엿보는 지금 즐거움이 크다.

 

  오늘 아침 안개비 따라 봄마저 가 버리고
  너를 떠나보내고 석양 하늘가를 쳐다보는데
  꽃을 떨군 줄기는 앙상하게 남아있고
  줄기에서 떨어진 꽃잎은 잠이 들었다

 

정약용, 초의선사, 김정희 등 그들도 아마 차를 마시다가, 하늘가 구름을 보다가, 지금과 같은 멈춘 느낌을 서로 바라보곤 하였을까? 누구나 이런 생각이야 할 수 있겠지만, ‘행복이란 나를 위한 노력이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 내 것을 내놓는 것이다’라는 흔한 이야기의 작은 매듭을 다시 만져본다. 얼마나, ‘차 마시듯 실천에 옮길 것인가’가 문제다라는 또 다른 매듭을 엮으며, 고개를 가슴 가까이 숙인다.

 

산다는 것은 우연의 연속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그 모두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난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한 번은 그러하듯, 가끔 멈춘 시간을 위해 차 한 잔을 마시며, 점점 작아가는 나 자신을 어루만지는 수밖에. 그래, 우연히 지금 차향 맡듯, 또한 언제 어디서 다시 차향과 마주앉을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한 때 멈추었던 작은 것들을 생각했으면 하는 엉뚱함에, 찻잔을 살몃 쓰다듬어 본다. 나도 지금은 찻잔에 멈춘 먼지 혹은 시간이고 싶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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