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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활로 지고한 예술세계 창조한 추사 김정희

우석푸른바다 2010. 7. 12. 01:48

 

 

 

 

추사 김정희



 우리나라 전통차의 흐름을 거슬러 보면 추사 김정희(1786~1856)란 거인을 빼놓을 수 없다. 
  19세기 중엽 사양의 위기에 있던 우리의 전통차는 다산 정약용(1762~1856), 초의 장의순(1786~1866)과 함께 추사와 같은 차의 명인이 있어 그 실날과 같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추사는 예술가로, 학자로 또 차인의 풍류와 선학자의 면모를 동시에 간직한 인물이다.
 추사의 차 생활은 2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석학 완원과 승설차를 마시면서부터 시작돼 결국은 차벌레가 된다. 그는 승설학인, 고다암, 고다노인, 다반향초 등의 호를 즐겨 썼다.
  차를 끓이며 시상을 얻었고, 차를 마시며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랬다. 명선, 차삼매, 선탑차연, 조주차 등의 용어를 즐겨 썼고 죽로지실, 일로향실 다로경권 등 불후의 글시를 남겼다.
 승설, 몽정, 영아 등 중국의 명차를 들먹였다고 중국차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토산차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중국의 최고 명차보다 우리차를 예찬한 차인이었다. 추사의 주변에는 늘 차가 있었다. 그의 글씨와 시귀에도 차는 빠질 수 없었다. 그의 예술 세계와 학문의 세계에 차의 향기가 풍기는 것은 그만큼 차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추사와 차에 얽힌 얘기는 그의 글씨만큼이나 유명하다. 특히 차승으로 이름난 당대의 석학 초의 스님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추사하면 초의를 연상하고, 초의하면 추사를 연상할 만큼 그들 사이를 풋풋한 녹차가 묶어 놓고 있다.
 동갑내기 추사와 초의의 만남은 그들의 나이가 30살 때로 보고 있다. 두사람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품위있는 차 생활과 박식한 초의 스님을 본 추사는 단번에 가까워진다. 남도의 산승과 세도가인 기린아의 만남은 조선조 말의 꽃이라고들 표현하고 있다.

  초의 스님이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시쳇말로 홀딱 반하고 만다. 어린아이마냥 보채는 추사의 편지는 지금의 차인들이 봐도 위트와 정이 흘러 넘친다.
  언젠가 초의 스님이 추사에게 차를 보내면서 백파 선사에게 한 봉지를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좋은 차를 본 추사가 제 손에 들어온 차를 전해줄 턱이 없다. 전해줄 용기가 나에게 없으니 앞으로 직접 전해주라는 식의 답장을 보낸다.
  매년 봄이면 초의는 정성들여 만든 차를 추사에게 보내게 되고 추사는 세금처럼 받아 먹었다. 차가 떨어지면 초의를 다그치는 편지가 빗발쳤다. 해남 대흥사에서 서울까지, 요즘도 차를 타면 하루가 걸리는 거리인데 걸음을 빨리 해도 2주일씩 걸리던 그 시절에 해남에서 한양까지 차를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다.
  '해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과 열수로 새차를 보내주셨는데 금년에는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워졌는데 두륜산의 한 납자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말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도중에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유마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가, 그 병은 그리 중하지 않는데 차는 어찌하여 이토록 더딘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할(욕질)이나 덕산발(몽둥이질)이 오히려 마땅할 것으로 백천겁을 지낸다해도 이 일할과 일방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머지는 더 말하지 않겠나이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번도 회답이 없으니 어찌된 것입니까? 산중에서 필시 바쁜 일도 없을 것이며 세상일에 간섭하고자 함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나같은 사람으로는 심히 답답합니다. 나는 초의를 보고자 함도 아니며 스님의 편지를 보고자 함도 아닙니다. 오직 차 인연으로 차마 단교하지 못할 뿐이며 능히 파괴치도 못할 뿐입니다. 또 이것은 차 보낼 것을 독촉하는 것뿐이지 편지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양년에 차 담는 소쿠리가 텅비었고 차 수입도 없으며 또 수입이 있다 해도 늦으니 애석할 일입니다. 2년동안 세금받지 못한 밀린 차를 함께 주실 것이요, 다시 미루어 잘못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투의 편지 뿐만 아니라 추사는 초의의 차를 빼앗아 먹는 데는 이골이 나있었다.
  '편지와 차 보퉁이를 보니 눈이 번쩍 띄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편지가 들어있는 것은 본시 생각도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치질로 고생을 한다고 하니 진실로 가이 없는 일입니다. 좋은 차를 혼자만 먹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먹지 아니한 까닭에 감실에 계신 부처님께서 영험하신 벌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실상은 하늘이라고 어쩌지 못할 일입니다. 차를 먹고 생긴 병은 차를 먹어야 낫습니다.'
  '어찌 스님 마음의 혜택을 칭송치 아니할 수 있습니까? 금년에도 차의 시기는 이미 다 지나버렸으니 이 늙은이의 차의 탐심을 채울 수 없어 침만 질질 흘릴 뿐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한 스님으로부터 연곡사 스님이 시험삼아 만든 차를 조금 얻어 써보았습니다. 품질은 대단히 아름다우나 스님의 수법을 가르쳐줌이 없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차의 혜택은 병든 위를 상쾌하고 깨끗하게 하여 골수에까지 미치는데 하물며 침울한 요즈음에 느끼는 차의 은혜는 어떠하겠습니까? 멀리있는 사람에게까지 끼쳐 주시는 두터운 그 뜻은 평생토록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공갈(?)을 치기도 하다가 또 추켜 올렸다가 어쨌든 차 몇 봉지를 얻으면 고마움을 못이겨 당대에 드날리는 명필을 휘둘러 글씨를 보내곤 하였던 추사였다.
  초의 스님에게 준 '명선'이란 불후의 명작이나 현재 대흥사에 걸려 있는 '운백복'이란 현판글, 제주도에서 '반야심경' 한벌을 써 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