率土山房/愚石의,,,,山房 이야기

오늘도 찻잔을 사랑하며

우석푸른바다 2010. 7. 4. 19:15

오늘도 찻잔을 사랑하며

 

오늘도
찻잔을 사랑하며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마음껏 풍류를 즐기며 마음을 풀어놓는 시간을 갖는 것. 이것이 차를 사랑하고 찻잔을 사랑하는 즐거움이며 오늘의 차문화가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차와 만나는 시간은 모든 것을 놓고 오로지 차에 집중한다. 그 순간에 있어 차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 나는 우주 속의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 차와 나를 이어주는 찻잔, 찻잔은 나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名 : 비상 크기 : 8.8cm X 6.7cm 작가 : 양승호 작업장 : 스위스에서 1999년 10월
조 건 : 백자 흙을 사용 유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1250~1350'C의 장작가마에서 일주일동안 지냄.

다기를 새로 구입하게 되면 식구들을 불러 빙 둘러앉히고 다기를 만드는 작업 과정과 작가의 정신(또는 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설명을 유심히 듣던 아이가 신기한 듯 작가의 사인을 바라볼 때면, '작가가 이 작품에 책임을 진다'는 표시라고 사인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주기도 한다.

찻잔에 대해 설명할 때는 먼저 물로 씻지 않은 상태에서 만져 보게 하고, 다관의 뚜껑을 여닫게 하여 흙과 흙이 닿을 때 나는 소리의 느낌을 읽게 한다. 그리곤 양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다음에 다기를 깨끗이 씻는다. 냄비를 두 개 준비하여 한 냄비에는 다관과 다호를, 또 다른 냄비에는 숙우와 찻잔을 넣고 끓인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두꺼운 타월이나 다포를 깔고 집게로 다기를 타월 위에 조심스럽게 내린다. 열기가 조금 가시면 다관과 찻잔을 아이들에게 양손으로 감싸쥐게 한다. 찻잔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게 하면서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설명을 한다. 지난번에 가서 함께 보았던 작가의 작업 과정과 생활을 상기하게 하고, 이 찻잔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들였을 정성과 흘렸을 땀과 노고를, 도자기를 굽는 순서에 맞추어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찻잔은 차를 내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도구이므로, 차를 낼 때는 비록 작은 찻잔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애정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다기를 대하는 바른 몸가짐에 대해서 일러준다.

차를 마실 때는 가능하면 그날의 차에 어울리는 찻잔, 또는 그 찻잔에 어울리는 차를 생각하여 낸다. 흙의 내화력이 약하거나 다공질의 흙을 사용한 경우 미세한 향과 맛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특히 햇차의 경우 세심한 선택이 요구된다. 차마다 성질이 다르고 찻잔 또한 같지 않기에 차와 찻잔에도 분명 어떤 관계가 성립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가능한 그 느낌이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라내는데, '이 차는 이 찻잔이라야 제 맛이다'라는 나만의 노하우를 얻게도 된다. 차를 마실 때는 다관에 차를 넣기 전에 찻잎을 보여주면서 차의 이름도 알려주고 새로운 찻잔으로 차 맛을 시음해보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때 흙의 종류에 따른 차 향과 색과 맛의 미묘한 변화를 느끼며 그 순간 나는 신선이 된다.

우리 가족은 아들과 딸이 있어 차를 마실 때는 잔이 네 개 필요하다. 일반적인 경우 다기 세트는 잔이 다섯 개다. 나머지 잔 한 개에는 그 계절에 흔한 꽃이라도 잔 속에 넣고 돌려보면서 감상한다. 그리 예쁘지 않은 꽃이라도 잔 속에 넣고 감상해 보면, 그 우아함에 매료되어 차는 더욱 향기롭게 느껴진다.

차가 선택되고 나면 물을 끓이면서 새 식구가 된 찻잔에 어울릴 듯한 잔탁을 고르게 된다. 찻잔의 크기와 모양, 색깔에 따라서 찻잔과 격이 맞는 것으로 정한다. 물과 차, 차와 찻잔, 찻잔과 잔탁의 어울림에서도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작은 시작들이 생활화되면 그 미적 감흥이 축적되어 찻잔이 단순한 차를 마시는 도구만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마시고 난 찻잔은 깨끗이 씻고 닦은 후에 내 마음에 쏙 드는 놈을 통풍이 잘 드는 곳에 놓고 나머지 잔은 그 다음 자리 순서에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찻장(茶欌)에 넣어둔다.

이렇게 찻장에 넣어 보관하는 찻잔들은 주기적으로 새로운 잔들로 다시 교체되어 자리를 잡고 주인인 나의 손길을 기다리게 된다.
새로 구입한 것 중 분청으로 만든 찻잔일 경우는 일주일간 매일 사용하면서 정을 주고 난 후, 1개월 정도 그 찻잔은 사용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용한다. 한 달쯤 지난 뒤에 보면 차선이 조금씩 윤곽을 잡아가면서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다루면 또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찻잔을 애인으로 생각하고 애정을 가지고 십 수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대하다 보니 처음엔 아내로부터 소꿉장난한다고 비난과 질투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고 여겼는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조금 줄여 달라는 요청과 함께 찻잔은 아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나의 애인이 되었다.

나는 아내가 인정해 주는 많은 애인들이 있다. 오늘밤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헤어지는 님도 있겠지만, 보고싶은 님은 언제라도 부를 수 있으니 나야말로 정녕 행복한 사나이가 아닌가!
오늘도 찻잔을 어루만지며 차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