率土山房/설록의 노래

茶 한 잔에 검심劍心을 품다

우석푸른바다 2017. 9. 23. 19:30

한 잔 茶에서  검심劍心을 품다.

 

 

 

차는 액체로 된 지혜라고 했고,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한 잔의 차로 곧 참선이 시작된다.”고 단언했다.

차를 사랑했던 다산茶山 정약용의 술을 마시는 백성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백성은 흥한다.”라는 발언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에 바쳐진 헌사들은 이처럼 차에 감추어진 신비를 찬탄한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차 한 잔 마시기도 쉽지 않고,

값진 다기를 받아 들고 다도체험을 해보아도 명사들이 설파하는 다도의 지혜나 신비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술이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하나의 유대감으로 묶어준다면,

차는 여럿이 모여 있어도 각각의 사람을 홀로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도 찻잔을 들고 옆 사람을 응시하지 않고 그 사람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차 한 잔을 든 우리는 철저히 홀로 인류 보편으로 통하는 공감의 통로 앞에 앉아 있다.

 

일상에 쫓기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차 한 잔을 들며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독이 깊어지고 차의 향이 우러나면 우리의 욕망도 주류서사의 그것으로부터 걸러질지도 모르고,

차의 맛을 음미하다 보면 우리가 담긴 세상을 음미할 줄 아는 혜안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산사의 사랑채에 앉아 스님의 덕담을 들어야 다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의 차인茶人 오카쿠라 가쿠조에 따르면 다도茶道일상의 하찮은 것들을 고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낭만이자 마음의 결의이다.

 

 

즉 다례의 법도란 삶의 낭만이지만 그 낭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결의이다.

때문에 서늘한 검의 날처럼 우리의 삶을 은은하고 정제된 빛깔로 반짝이게하는 다도의 리추얼,

그것이 빠진 다도의 예, ‘웰빙이나 힐링이라는 권태로운 이름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심오한 설법이 입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구가 밤낮으로 떠오르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다도는 검심이다.

우리는 수없이 갈고 닦은 검 하나를 지닌 채 머나먼 우회로를 돌고 돌아(경험이든 독서든 여행이든...),

떠난 곳으로 돌아와 차 한 잔을 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차 한 잔이 지혜가 되고 참선이 되어 우리를 구원한다.

 

 

 

 

오후의 햇살이 대나무 숲을 환하게 비추고 샘물이 희열처럼 솟아오를 때,

탕관에서는 솔잎 사이를 지나는 아득한 산들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덧없는 것을 꿈꾸며 사물의 허술한 아름다움에 잠시 젖어보심이 어떨지......”

 

-오카쿠라 가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