率土山房/愚石의,,,,山房 이야기

연필과 작설차

우석푸른바다 2010. 7. 12. 01:40

 

 

 

 

 

오후에 제가 즐겨쓰는 필기구가 다 떨어져,
잠시 시내 문구점에 들렀었습니다.
다양한 필기구들이 문구코너에서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제발 나좀 데려가줘~~' 하고 애원하는 듯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몇 자루 골라쥐고, 주변을 돌다보니, 생각지도 않게
연필들이 눈에 띄어 몇 자루 꺼내 보았습니다.
유년시절엔 단조로운 색깔에 끝에 지우개가 앙증맞게 달려있었던
'문화연필', 동아연필', '사파이어' 등의 브랜드네임이
기억의 끝에서 얼굴을 내밀어 희미하게 입가에 웃음이 흘렀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와 연필을 깎았습니다.
연필은 작설차와 같습니다.
연필로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검고 단단한 흑연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옷을 벗겨 내는 일~~
심을 갈아 내어 끝을 뽀족하게 만드는 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무에서 풍기는 숲의 내음~~
흑연가루가 상징하는 시간들~~
작설 한 잔을 위해서 물을 끓이고 찻잔을 씻고
물을 식히고 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정리되고
잡사(雜思)가 달아나는 것처럼 연필을 깎다 보니
단순한 동작에서도 여러 생각들이 모아졌습니다.
산사(山寺)에서의 삼천배가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저처럼 삶이 끝난 후의 흔적에 대해 겁을 먹는 사람에게 있어서
연필이 제공하는 위안이 오늘 새롭습니다.
지울 수 있다는 것~~
아무 말도 쓰여지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내 성과 없는 삶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
신문지 위에 소복히 연필의 옷이 벗겨져 쌓입니다.
너무 힘든시절에 살다보니, 물자절약 해야 한다며
볼펜의 흰 몸통에 몽당연필을 끼워서 플라스틱 필통에 예쁘게 깎아,
제 지식을 위해 희생을 해주며 저와 함께 성장하다
이젠 삶을 다해 흔적없이 사라져간 소품~~
연필의 키가 작아지는 것을 보면서 불현듯 느끼게 되는 근거 없는 자긍~~
'함께 하며 무언가를 많이 배웠다'는~~
마치 도서관 문이 닫힌 후, 수은등으로 오히려 어두운 교정,
나무와 풀의 몸내를 맡으며 걸을 때 마음 속 차오르던 즐거움 같은 것~~
유년의 시절부터 연필의 살신(殺身)에 부끄럽지 않은
저의 발자취를 남기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건지
영 자신은 없지만 역사 이래의 모든 죽음이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