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서핑하다 찾았습니다. 읽어 보셨을 수도 있지만, 혹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단 생각에 옮겨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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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의 실체
.. 열풍처럼 불어 닥치고 있는 보이차 신드롬.
보이차가 만세(萬世)의 영약인양 선전하고 있는
얄팍한 상술로 무장한 일부 악덕 상인들에 의해 우리의 차문화가 병들고 있다.
알고 마시면 우리몸에 이로움을 전할 수 있는 보이차의 진정한 효능과 그 유래,
그리고 현재의 보이차 현황에 대해
오래전부터 " 한국 차문화 속의 보이차 " 라는 과제를 파헤쳐 온
여연 스님을 모시고 집중 조명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편집자주 >
보이차의 실체 - 글 / 여연
필자는 그동안 보이차 국제학술대회,즉 연토회를 두번씩 참가했다.
그 첫번째는 운남성 곤명에서 2000년도 5월에 치러진 운남성 자치주 인민정부와 다엽협회가 주체가 된 학술토론회였고,
두번째가 이번 6월에 " 2002년 중국 보이차 국제학술연토회 "라는 주제로 중국 국제차문화연구회와
운남성 쓰상반나[西雙版納,서쌍판납] 태족 자치주 인민정부 다엽협회가 주관한 대회였다.
필자가 보이차에 관심을 갖고 많은 경비를 들여 두번씩이나 학술연토회에 참가한 것은
보이차의 올바른 실체를 알고 더 나아가 중국차를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근 30년 가까이 차를 연구하고 차를 만들어 온,
더구나 초의선사께서 선(禪)의 깨달음과 차(茶)정신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심혈을 기울이며
40년 동안 주석하신 일지암에 사는 필자로서는 우리의 전통차,우리 민족문화의 한 원형인 차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사명감에서이다.
다시말해 우리 차문화의 원형을 복원하고,우수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웃 동양삼국(중국,일본,대만)의 차문화 실체인 다도,차연구,제다의 현실,차나무의 육종관계를
폭넓게 인식하고,바른 정보를 통해서 지식을 습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남을 알아야 바로 나를 알 수 있다는 옛 사람의 진리처럼
우리는 이웃나라의 차문화 현실 풍토를 알아야한다.
그런데도 애석하게 우리의 차현실은 행다(行茶)의 사치한 으식(儀式)에 매몰되어갈 뿐,
야생 차나무가 개차(신차)로 열성화되어 가는데도 야생차나무가 곧,최고차라는 잘못된 인식에 빠져
차나무의 육종개발에 힘쓰고있는 세계의 차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다인들이 이러한데 일반사람들이 차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는가?
보이차의 건강한 유통구조가 전무한 한국내 보이차 소비시장은 그야말로 낮도깨비판이다.
조계사 근처의 인사동이나 부산의 보이차 가게, 또는 가게도 없이
보따리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술은 그야말로 기상천외다.
연도를 알 수 없는(不知年)보이차에서 부터 수 백년 된 차가 부지기수이다.
가격도 천차만별 천만원에서 수십만원이 넘는 보이차가 전부다.
심지어 운남서 맹해 보이차 공장이 올해로 53년 됐는데도,(그 공장에서 나온)차를 버젓이
운남성 보이 칠자 병차라는 상표를 붙여 70~80년 됐다고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다.
오죽하면 중국국제 차문화협회 회장(2001년)이신 왕가양 선생은 한국의 보이차 시장은
아버지가 없는 아들이 더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을까 !
대만 사범대학 등시해 교수("한글판 보이차"-도서출판 대우문화사)는 보이차에 대한 책을 펴내며 이런 글을 남겼다.
"한국에 와 인사동 등 유명한 중국차 상품점을 두루 둘러봤습니다.
많은 다인들에게는 좀 안된 일이지만 대부분 진품으로 쳐주기에는 어려운 차들이 많았습니다.
진품의 유무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제대로 된 보이차를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진편 보이[푸얼]차는 중국 운남성에서 홍콩,대만에 이르기 까지 거의 가품(가짜)이고
진품은 대부분 소장가들의 손에 있지요.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최고 몇백년 된 보이차가
많다는 점에 대해 무척이나 의아(궁금)해 했습니다."
등교수의 이 말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가격이 비싼(중국에 비해 백 배, 수십 배)것에 대해 놀랐고,
몇 백 년 된 차가 만다는 것에 놀랐다는 그는
그것마저도 전부가 가짜라는 것에 더욱 놀랐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는 중국 보이차의 유래와 효능, 제조과정등 보이차의 과거,현재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이보다 더 자세하게 한국차인회에서 열고있는 다도대학원에 필자와 함께 교수로 강의하고있는
짱유화 교수가 펴낸"보이차"에는 너무도 상세하게 보이차의 실체가 적혀있다.
등시해 교수의 지적처럼 가격이 비싼 몇 백년 된 가짜 보이차가 많은
한국의 보이차 가게가 성황을 이루는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보이차 장사들의 상술적 농간이 가장 심하고,
다시말해 한국의 녹차들은 위를 차갑게 하여 건강을 해치는 것에 반해 보이차는
사람의 몸을 뜨겁게 하고 기(氣)를 통하게 하는 선약,보약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녹차는 차가운 성질이 아니라고 한서대학교 한방병원장인 도원석 교수는
'동의보감'과'본초강목'을 예로 들어 말하며,오히려 차는 청(淸)하다고 말하고 있다.
옛 중국 문헌에 보면 오히려 몽산의 차(녹차)는 사람의 몸을 뜨겁게 해 준다고 말하고,'동다송'에서도 초의스님은
유력열지(有力悅志),다시말해 사람에게 기운을 내게하고 기쁨의 기(氣)를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
어쨌든 보이차의 실체를 얘기해 보자.
푸얼차[puer tea]라는 이름의 기록은 명나라 말년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식'중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고 '고천다록선집'에 밝히고있다.
흑차 종류인 보이떡차는 15세기의 문헌'명사(明史)'에서 처음으로 언급하는데
"상차(湘-호남성의약칭)는 품질이 낮아 모두들 흑차로 만들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호남성,운남성,사천성 등 산간오지에서 자란 야생찻잎이 워낙떫어 부득이 묵혀
발효시킨 후 마셔야 했고, 이를 처음 접한 중원(中原)에서는 흑차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후발효차(post-fotation tea)는 이를 본떠 모두 흑차라고 부른다.
당나라(618-907)이전부터 중원에서도 비옥한 토양에서자란 차순을 볕에말려 덩어리인
떡차를 만들어 여러양념(산초,생강,계피)를 첨가하여 마셨다.
이들 소수민족이 남쪽으로 이민해오다 중원과 같이 깊은 산속에서 자란 야생찻잎을 따서
햇빛에 말린후 덩어리차를 만들어 신선할 때 쪼개서 끓여 마시려고했다.
그러나 이 차는 너무 강해(탄닌과 카테인이란 떫은 성분)곧바로 마시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야생에서 자생한 떫고 조잡한 큰 찻잎으로 만든 떡차를 묵히는 방법을 통해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원하든 원치 않았던 불가피하게 발효차를 마시게 되었고,또한 삶에 맞게 이동 및 보관하기 위해 차를 쪄서 압력을 주어 덩어리차를 만들게 된 배경이다.
신선한 야채 즉 비타민c부족으로 괴혈병에 시달렸던 유목민들에게 보이차는 필수품이었다. 신선한 녹차는 이들의 생존음료로 자리 잡았다 .
13세기 몽고족들이 중원을 통치했던 때 비로소 이곳 찻잎 이름의 문헌이 만들어 지게 된다.
후에 이 지방의 말의 음을 따 중앙세서 한자로 변환하여 기록했는데 이것이 푸얼부로 표기됐다.
때마침 중앙에서 이곳의 찻잎을 부르는 이름이 없는 터라 보이부의 푸 (普)자를 따서 푸차(보이차)라고 불렀으며
이 차가 다마 무역으로 번창하여 티벳 위구르족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원나라가 망하고 주원장이 단차(떡차)를 폐단이 심하다 하여 폐지 시키는 칙령을 내려 잎차인 엽차를 마시는 포다법(泡茶法)시대가 열린다.
이 칙령으로 몇 천년 동안 중국차문화를 이끌어 왔던 덩어리 차는 중원의 차 역사에서 사라진다(물론 여기에서 말한 당대,송대의 떡차는 운남성 등지의 차와는 다르다)
몇 천 년 동안 중원의 시각은 오늘의 보이차라고 부르는 덩어리차를 야만인들이 마시는 품질이 낮고 보잘 것 없는 차로 취급하였다.
이렇게 천대받던 차가 청대에 들어서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당송 시대의 떡차는 단절 됐지만 운남성 등지의 떡차는 계속 이어져 청나라 왕실에서 운남성 총독이 바친 보이차를 처음 접하고 이색적인 차향에 매료되어 보이부 닝얼이란 곳에 공장을 세우고 해마다 조정으로 공차를 만들어 바치도록 한다.
여기서 만들어진 최상품은 소엽종 찻잎이었다.
보이공차는 청나라 귀족들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뒷날 문헌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던 공차는 곡우 후에 자란 어린 새싹을 어린 소녀들이 골라 따서 곧바로 속옷 깊속이 넣어 소녀의 온기를 충분히 받은 후 대나무 광주리에 담은 차를 이름붙인 것이다.
1729년 공차로 지정되어 성행하다가 1908년 정권이 혼란해지면서 곤명지방의 공차가 강도들에게 모두 약탈되자 조정에서는 보이차 공납을 폐지 시키게 된다.
이전까지 서역시장의 수요가 달려 보이차를 취급하는 상점들이 많이 생겨 운남성 내의 유명한 상점으로 동경호,복원창호,송빙호,동창호,가이홍,원태풍 등이 있었고, 오늘날 인사동에 나온 수백 년 묵은 차는 바로 그런 상점들에서 나온 이름 뿐인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초기 야생 차청을 사들여 햇볕으로 말린 건창법(메주의 푸른 곰팡이라는 과정을 통해)으로 만들어진 차는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유산으로 간주되어 모두 불태워진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보이차는 그 뒤 운남성 등지에서 임의적으로 만든 습창법 상품들이다
이런 습창법에 의해 만들어진 차는 옛 보이차를 다시 그리워하게 만들고 그 맛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 중국 현대의학에서 임상실험을 통해 밝힌 콜레스테놀 수치가 감소 된다는 것과 비만 체중감량 특효로 보이차 인구는 급증하게 되고, 해외에서 성공한 화교들이 보이원차야말로 진정한 보이차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차 상인들이 옛 보이차를 수소문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청나라 때부터 보이차를 수입한 홍콩의 차상점들이 인기 없는 보이차를 대부분 창고에 버려 두었는데, 이것이 천정부지의 값으로 역풍이 되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 창고에서 나온 것들이 동경호, 경창호, 홍인,녹인 등의 최상품 보이차이다.
한편,대만지역에서도 보이차가 유행되자 홍콩의 상인들은 홍콩의 보이차를 다 수거하여 대만으로 판매하여 때부자가 되었는데 다시 홍콩에서는 그들이 판 보이차를 대만에서 역수입하는 상황이 생겼다.
여기에서 일부 가짜인 차를 진짜 보이차로 둔갑시킨 차들이 오늘날 한국 보이차 장사들에 의해 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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