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말의 역할
며칠 전, 우연히 (로널드 설이 그린 영국의 가상 학교 세인트 트리니안)의 그
림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구겨진 표정의 한 할머니가 “지긋지긋한 음악 수업…”이라고
중얼거리며 바닥에 잔뜩 떨어진 음표들을 빗자루로 쓸어 담는 모습이다.
로널드 설의 그림
생각해보면 음악이란 어디에나 있지만, 또 어디에도 없다.
음악 박물관이라는 걸 만든다면 아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박물관이 되어버릴 것이다.
악보나 악기, 연주자의 사진, 녹음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매체,
그리고 그걸 들을 수 있는 기계 장치들은 전시될 수 있지만
음악 그 자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거다.
언어 체계를 거치지 않고 전달하는 말,
감정, 느낌이라니. 오페라나 리트, 몸의 언어를 사용하는 무용까지 포함하여
다른 장르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고고한 예술이 바로 교향악,
실내악, 독주라 생각했다.
대중음악의 가사는 그저 손쉽게 쓰이는 줄 알았다.
익숙한 언어, 재치 있는 표현으로 사람들이 무의식에서도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손쉽게 유희하도록 안내하는 일.
시(詩)의 즉흥적인 방식, 직접적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쉬운 일이라 여긴 건 절대 아니었고,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충실히 잘 해내고 싶은 게 작사를 시작할 때의 내 마음이었다.
사람들의 일상의 틈을 경쾌하고 산뜻하게, 때로는 뭉클하게 채우는 일.
김윤아가 부른 ‘나인 너에게’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마더’의 OST로 쓰일 거라는 데모 음원과
좋은 음악과 목소리,
곡이 발매되고 드라마에 삽입된 장면을 본 후 몇 번을 반복해 들었는지 모른다.
음악 안에서 김윤아는 마치 배우 같았다.
곡에 프레이즈를 만들고, 멜로디에 색을 입히고,
듣는 이들이 음악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깊은 감정의 영역까지 끌어당기는 일을
김윤아의 목소리가 하고 있었다.
고음의 영역도 특유의 강렬한 보컬이 아닌 힘을 쭉 뺀
아득한 톤으로, 마치 가사를 쓸 때의 의도를 꿰뚫고 있는 듯 부르고 있었다.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덕분에 노랫말이 하는 일을 몇 가지 더 생각하게 됐다.
음악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을 듯 흐릿한 감각들을 더 뚜렷하게 만들어준다는 것,
부르는 사람이 더 깊은 감정의 영역을 폭넓게 표현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덕분에 듣는 이들의 감상도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
세인트 트리니안 학교에서 누군가
‘나인 너에게’를
부른다면 멋지게 채색된 가사를 휘감은 음표들이 떨어져 있을 것 같다.
서양 전통음악의 관습 안에서 행위자보다 창작자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꼭 그렇지 않다는 것도 김윤아의 노래를 들으며 알게 된 점 중 하나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몸으로 행하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에 대해서도 이렇게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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